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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 김수연 <윤동주 평전>
작성자 김수연 등록일 22.07.05 조회수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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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평전> - 송우혜 / 서정시학 저, 562

2103 김수연

개인의 일생에 대하여 평론을 곁들여 적은 전기를 평전이라 말한다. ‘평전이란 것을 읽어본 것은 처음이어서, 낯선 첫인상이었으나 읽고 나니 상당히 낯익은 스타일이었다. 이를 테면 <달과 6펜스>. 이 작품은 스트릭랜드를 주인공으로, 화자는 오직 스트릭랜드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이를 보면 평전이나 다름 없다. 차이점이라면 화자가 스트릭랜드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는 정도-다만 그것이 소설의 묘미이다-. 또한 내 문체도 애초에 너무 많은 인물을 등장시키지 않고,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특정 인물에 대해 적나라한 시선으로 서술하기에 평전과 비슷한 분위기이다. 그래서 평전은 낯설거라 생각했으나 낯설지 않았다. 차이점을 꼽자면 소설은 어디까지나 가상이고 평전은 분명한 현실이란 것이다. 그것을 자명히 느낀 것은 아래 구절에서였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들은 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극동의 만주 벌판이 유럽의 곡식 창고 역할을 했다라는 문구에 담겨서 역사책에 남아 있다.

나는 의무적으로 한국사를 배우는 세대이다. 인터넷으로 전해 듣기를, 한국사가 필수 과목이 아니었던 시기가 있었다고 한다. 여하튼 나는 그 시기를 지나간 배우는 세대이니, 당연히 위 구절이 말하는 문구를 알고 있었다. 공부는 중요한 것을 위주로 하는 것이고 한국사 또한 공부이다. 때문에 한국사 또한 중요한 사건을 위주로 공부하고 그 중요도가 낮아짐에 따라 머릿속 빈 구석에 빠져나와도 괜찮은 마음으로 넣었다. 그러나 그러한 문구가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인생이고, 그와 대비되게 그곳에 나고 자란 사람의 시를 아주 빼곡히 해부한다. 이러한 공부에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중요도에 따른 공부는 곧 사람의 가치를 중요도란 기준에 의해 판단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기도 하다. 나 자신도 온전히 판단할 자신이 없는 내가, 타인의 가치를 판단한다는 것에서 자연스럽게도 부끄럼이 흘러나온다.

부끄럼이란 것은 모든 불완전한 존재들이 그들의 불완전함을 슬퍼하는 참회의 방식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에 인간이 정직하게 부끄럼에 마주서자면 그의 전 존재, 그의 전 중량이 필요하다.

슬픔보다도 헐벗은 것은 부끄럼이라 생각한다. 슬픔은 단지 그 자리에 주저 앉는 것이라 한다면, 부끄럼은 주저앉아 제 속을 들여다 봐야 한다. 윤동주 시인이 우물에서 한 남자의 모습을 들여다 본 것처럼. 그 속 안에서 슬픈 것들 사이 날카로운 것을 찾아야 부끄럼을 느낄 수 있다. 부끄럼이란 것이 온전히 제 잘못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존재하는 지도 몰랐던 한 인간이 어느 작은 동물에게 가혹한 해를 끼친 것으로도 부끄러워 할 수 있으니. 때문에 구절 속 불완전함이 아주 정확하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기에 슬퍼할 수 밖에 없고, 내가 슬퍼하는 이유가 내 불완전함 때문임을 아는 것이 부끄럼이라 생각한다.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불완전하지 못한 자신으로 인해 슬퍼하는 자신에게. 나는 그것을, <윤동주 평전>을 읽으며 그의 생애가 피력하는 부끄럼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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